남미 칠레에서 군부 독재 시절에 만들어진 헌법을 대체할 새 헌법 제정 여부가 다음 달 국민투표로 결정된다.
지난해 만들어졌던 헌법안이 부결된 이후 1년여 만의 재시도다.
가브리엘 보리치(37) 칠레 대통령은 7일(현지시간) 칠레 의회에서 새 헌법 최종안을 전달받은 뒤 헌법 제정 여부를 결정할 국민투표 시행령에 서명했다. 투표일은 다음 달 17일이다.
보리치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칠레는 국가 미래를 정의할 중요한 순간에 직면해 있다"며 "이 헌법이 칠레 국민을 하나로 묶는 안인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 여러분께서 이 제안을 승인한다면, 정부는 그 뜻의 올바른 구현을 위해 절차에 따라 처리할 것임을 약속드린다"고 덧붙였다.
앞서 제헌의회 성격의 헌법위원회는 약 4개월간의 신헌법 초안에 대한 검토와 의결을 거쳐 지난달 4일 최종안을 전문가위원회에 제출했다.
이번 헌법위원회는 극우파를 중심으로 한 보수 정당 추천 인사들이 대거 포진했다. 헌법 위원들은 각 정당 추천 등을 거쳐 지난 5월 국민투표(투표율 84%대)를 통해 선출됐다.
이는 원주민과 무소속 등 진보적 성격의 인물로 꾸려진 2021년 제헌의회와는 구성원 측면에서 180도 바뀐 것이다. 이에 따라 새 헌법 초안에도 보수적인 색채가 짙어졌다.
보건·교육·깨끗한 물과 위생·거주지 등 5가지 사회적 권리 보장, 국유재산 소유권의 민간 이전, 태아 생명권과 민간을 포함한 의료시스템 선택권 허용 가능성, 기후변화 명시 배제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앞서 원주민 자결권 확대와 양성평등 의무화 등을 강화하는 내용이 폭넓게 담겨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2021년 제헌의회 제정 헌법안은 지난해 9월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반대(61.9%)로 부결된 바 있다.
당시 칠레 국민들은 급격한 사회 변화를 강제하는 성격의 헌법 조항 등에 대해 "충분한 여론 수렴의 시간이 없었다"며 크게 반발한 바 있다.
1년여만에 새 헌법 제정안이 이념적으로 완전히 방향이 바뀌어 손질됐지만, 그 통과 여부는 이번에도 미지수다.
지난달 25∼26일 시행해 공개된 여론조사 기관 '카뎀'(CADEM)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51%가 12월 새 헌법안 찬반 국민투표에서 '반대할 것'이라는 의사를 보였다. '찬성할 것'은 34%였다.
이는 새 헌법 제정 절차가 반복되는 가운데 좌·우파 이념 대립이 심화하는 것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을 반영하는 결과로 풀이된다.
이날 공식적으로 헌법위원회 해산을 선언한 베아트리스 에비아(31) 위원장은 "새 헌법은 제도적·정치적 불확실성을 종식하고 법치를 강화해 경제를 활성화하는 도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칠레에서는 2019년 10월 사회 불평등 항의 시위 이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독재 시절(1973∼1990년)인 1980년에 제정된 현행 헌법을 폐기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2020년 국민투표에서 78%의 국민이 피노체트 헌법 폐기와 새 헌법 제정에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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