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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콜롬비아 평화협정 국민투표에서 부결2016-10-31 1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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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26일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과 최대 무장반군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의 지도자 로드리고 론도뇨는 카르타헤나에서 만나 이날 50년 이상 끌어온 내전을 종식하는 평화협정에 공식 서명했다.



‘콜롬비아 분쟁으로도
불리는 콜롬비아 내전은 대략 1964년에 시작됐다. 그때부터
소련이 무너진 1991년까지는 냉전의 일부로 진행됐다. 소련과
쿠바가 공산 반군을 지원하고,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가가 정부군을 도왔다. 일종의 냉전 당사자의 대리전 성격으로 내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지면서 좌익 반군에 대한 지원을 끊자 쿠바도 손을 뗐다. 이후로는 내전의 명분과 성격이 마약카르텔을
소탕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내전은마약과의 전쟁의 일부로 성격이 바뀌었다.



콜롬비아는 한때 세계 최대의 마약 생산·유통국가로 악명을 떨쳤으며 냉전이 끝날 무렵 악명의 최고조에 이르렀다. 내전을
틈타 마약 조직이 국토의 상당 부분을 코카인 재배지로 만들고 대량 생산해 세계에 팔았다. 코카인은 커피와
더불어 콜롬비아의 주요 농작물이 됐다. 이러한 고가 마약인 코카인의 상당 부분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은 자국에 대한 마약 공급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냉전 후에도 콜롬비아에 더욱 깊숙이 개입했다.



콜롬비아 내전의 양상은 저강도로 진행되었다. 정부군과 반정부군, 민병대, 마약조직이
서로 대규모 공격과 방어를 하는 열전도,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냉전도 아닌 묘한 성격의 내전 또는
분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를저강도의 비대칭
전쟁이라고 부른다. 분쟁 당사자도 복잡하다. 콜롬비아 정부군과 민병대, 마약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범죄단, 콜롬비아혁명군(FARC)과 전국해방군(ELN)을 비롯한 좌익 게릴라 조직 등 구성이 다양하다. 이들은 콜롬비아
내에서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서로 전투를 계속해왔다.



콜롬비아 내부 갈등의 역사는 194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중정치인이던 호르헤 엘리에세르가
암살당한 사건이 방아쇠였다. 콜롬비아에서는 이를라 비올렌샤(폭력)’로 부른다.
사건 이후 미국이 콜롬비아 정부에 강력한 반공정책을 펼치도록 종용했다. 이를 계기로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1960년 대에 자유주의적이거나 공산주의적인 민병대들이 FARC
재 집결하게 됐다. 그러면서 정부분과 좌익 게릴라, 민병대, 마약 조직이라는 대립구조가 본격화했다.



이렇게 수많은 그룹이 서로 싸우게 되면서 내전이
복잡해지고 이에 따라 해결도 어렵게 되었다. 내전 참가단체들이 싸우는 이유는 다양하다. FARC와 다른 좌익 게릴라들은 콜롬비아 정부의 폭력으로부터 가난한 농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해 사회 정의를 이루겠다고 약속한다. 콜롬비아
정부는 질서와 안정을 위해, 그리고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강조한다. 우익 민병대 조직들은 좌익 게릴라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장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좌일 게릴라와 우익 민병대는 서로 상대방이 마약 제조·밀매와 테러와
연계됐다고 비난한다. 콜롬비아 내전에 개입하고 있는 모든 집단은 수많은 인권 유린을 저지른 것으로 비난받고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민간인이 지고 있다.



내전상황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콜롬비아 국립역사기억센터의 연구에 따르면 내전으로 1958년부터 2013년 사이에2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목할 점은 전투원보다 무고한 주민의 희생이 더 많다는 점이다. 전투원은 4787명이
숨진 데 비해 민간인은 177307명이 목숨을 잃었다. 1985년과 2012년 사이에500만 명의 콜롬비아 국민이 집과 터전을 잃고 다른 곳으로 강제로 옮겨가야 했다. 콜롬비아
전체 인구의 16.9%에 해당한다. 큰 전투나 밀고 밀리는
대규모 공방전이 없는 대신 국토가 황폐화되고 국민이 고통에 시달렸다


유엔난민기구(UNHCR)을 비롯한 국제기구는국내실향민(IDPs: Internally Displaced Persons)’이라는 용어로 이들을 표현했다. IDPs무장 분쟁, 무분별한
폭력 상황, 인권 유린, 각종 재해 등으로 자신의 집이나
일상적 거주지에서 강제로 또는 어떨 수 없이 도피하거나 떠나게 된 사람이나 사람들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된 경계선(국경
)을 넘지 않은 사람으로 정의된다. 국경을 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제법상으로는 난민으로 분류되지 않지만 이들을 실질적인 난민으로 보는 단체도 있다. 이들을국내 난민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2014
기준으로 전 세계에는 3820만 명의 국내실향민이 있다. 국내실향민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89년 이래 가장 많은 숫자이다. 유엔난민기구는 2014년 기준으로 콜롬비아 국립역사기억센터의 2012년까지의 통계보다
많은 600만 명의 국내실향민이 콜롬비아에서 발생했다고 추정한다. 이는 21세기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시리아(760)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이다.



이런 비극을 종식하기 위해 양측은
역사적인 휴전합의를 했다. 2012 9월 시작된 지루한
협상의 종착점이었다. 52년 이상에 걸친 기나긴 분쟁이 이렇게 끝나는 것으로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하지만 10 2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평화협정안은 근소한 차이로 부결됐다 하지만 산토스 대통령은 반백년의 장기 내전을 사실상 종식한 공로로 201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국민투표는분쟁을
끝내고 안정적이고 지속하는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최종 합의안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각각아니오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다. 국민투표에 참가한 13066047명의 콜롬비아 국민 중 6377487(49.79%)라고 대답했고 6431376명(50.21%)은 ‘라고 대답했다. 평화협정안은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투표율도 낮았다. 34899945명 중 37.44%만이 투표에 나섰다.



반대 투표를 한 사람들이 가장 불만을 제기한 부분은
좌익 게릴라들에 대한 사면조치이다. 이들의 과거 행위에 대해 좌를 묻지 않기로 한 합의가 피해자와 그
가족들, 참상을 목격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이토록
오랫동안 이 정도 피해를 입었는데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콜롬비아에서 정의를 찾을 수 없다는 여론이었다. 콜롬비아
국민은 일단 갈등의 봉합보다 정의를 원했다.



콜롬비아 정부와 반군 FARC는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 발표가 나온 지 몇 시간 만에 쿠바 아바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국민투표에서 나온 반대 목소리를 반영해 평화협정을 수정하겠다
밝혔다. 이들은평화를 달성하고 내전 종식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개혁과 조치를 취하겠다신속히 해법을 찾고 우려를
이해하기 위해 신속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회 진영의 목소리를 계속 듣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수정안 마련에 나서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산토스 대통령은 노벨상 상금 800만 크로나( 11
)를 내전 희생자들에게 기부했다. 산토스 대통령은기부한 상금은 내전 희생자들과 화해를 위한 프로젝트와 프로그램, 재단
등에 쓰일 것이라며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FARC와 서명한 합의를 이행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자료: 이코노미스트. <[우여곡절의 콜롬비아 평화협정] 극적인 합의에도 국민투표서
부결>. 1356, 2016.10.24 http://jmagazine.joins.com/economist/view/31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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